Subject[Chicago ]이봉기(鳳基.79) 정덕모(德謀.74)동문의 외손녀 이미한양 링칸박물관 개관 에세이 대상
 
서울의대를 졸업한 이봉기(鳳基.79)씨와 서울대 국문과를 다녔던 정덕모(德謀.74)의 외손녀 이미한양 19일 문을 연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링컨 박물관 개관 행사에서‘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기, 새로운 자유’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낭독하고 있다. 이 양은 케이블 방송인 C-SPAN이 링컨 박물관 개관 기념 사업의 하나로 주최한 에세이 콘테스트에서 미 전역의 5천400여 참가자를 제치고 대상을 수상했었다. (시카고=연합뉴스)

다음은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링컨 박물관 개관행사에서 이미한양이 낭송한 C-SPAN 에세이 콘테스트 대상작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기,새로운 자유 (A New Country, A New Century, A New Freedom)' 의 전문이다.

'자유'에 대한 나의 이해는 곧 '언어'에 대한 이해로 강하게 연결된다.나의 증조부께서는 1940년대, 일본 정부에 의해 한글 사용이 금지되던 시절의 한국에서 최초의 한글 사전을 편찬하다 체포되셨다. 증조부께서는 만약 언어가 억압받는다면 사람들의 이념을 형성하고 나누는 매개체인 언어로 인해 이념도 좌우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으셨다. 그는 자신의 동포들이 모국어로 이념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싸웠으며 그럼으로써 한국인들이 이념을 가질 고유한 권리를 지키셨다.

성인으로서의 자유와 책임을 준비하면서 나는 내가 물려받은 자유의 정의들을 기억하고 거기에, 우리 가족 가운데 새나라에서 태어난 첫 세대로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기의 미국 청소년으로서 내 자신의 정의를 더하려고 노력한다. 쉬는 시간 나는 친구들과 학교 복도에서 학교 당국의 실수와 동성 결혼의 권리,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 토론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들을 인식하고 평가하고 이야기 하며 그에 대한 고유한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나는 21세기의 자유는 나이와 인종, 성, 지위등과 상관 없이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이같은 언어를 이용해 역사를 만들어가는 개인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자유를 누리면서도 동시에 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나는 한국계 미국인이며 젊고 자유롭다. 나는 말한다.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니고 가끔 틀리기도 하지만 나는 나의 고유한 언어로 말한다. 나는 말한다. 그리고 또 나는 듣는다.



My understanding of freedom is inextricably tied up with my understanding of language. My great-grandfather, in 1940s Korea, was arrested for putting together the first Korean dictionary when the language had been bann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My great-grandfather believed that words, the medium by which we formulate and share ideas, can bind and break the very ideas they express if the language is that of an oppressor. He fought for the freedom of his people to express ideas in their own words; in so doing, he defended their very right to have ideas.



As I prepare for all the freedoms and responsibilities of adulthood, I remember these definitions of freedom I have inherited, and strive to make ones of my own -- not only as the first generation of my family born in a new country, but also as an American youth at the birth of a new century. Sitting in the hall between classes, my friends and I discuss the faults of our school's administration, the right to same-sex marriage, the justification for the Iraq war. We feel it is our right to know and evaluate our surroundings, to speak and have our ideas responded to.



I believe that freedom in the 21st century means the liberty of individuals, regardless of age, race, gender, or class, to express themselves in their own words, and to use those words to shape history. We celebrate it, and yet we never stop fighting for it. I am Korean-American, I am young, and I am free. I speak -- not always articulate, not often right, but always in my own words. I speak, and I listen.

(시카고=연합뉴스)



이미한 양의 가족들이 전하는 반일 에세이 배경

증조부 이병학ㆍ정인승, 사립학교 운동 선각자


일제의 한글 탄압을 비판하고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미국을 감동시킨 한인 2세 이미한(17)양의 에세이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24일 이 양의 가족들에 따르면 이 양은 에세이의 소재가 됐던 국어학자 고 정인승(鄭寅承) 박사의 친외증손녀일 뿐만 아니라 정 박사와 함께 사립학교 운동의 선각자로 활동했던 고 이병학(李丙學) 선생의 친증손녀이기도 하다.

1920년대 당시 정인승ㆍ이병학 선생 등 선각자들은 일제 극복을 위해 신학문과 신사상 수용이 시급하다고 판단, 사립학교 운동에 투신했으며 두 사람 모두 전북 고창 고보에서 정 박사는 영어와 국어를, 이 선생은 체육을 가르치며 10년 동안 서로 이웃해 살면서 지냈다.

고창 고보는 당시 '북에는 오산, 남에는 고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강한 민족 교육을 지향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일제에 항의하기 위한 동맹 휴학 투쟁에 선봉이 됐다.

1935년 일제의 사학탄압으로 두 사람은 고창 고보를 떠나 정 박사는 조선어학회에서, 이 선생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 등과 함께 흥사단에서 활동하다 보성전문학교(고려대의 전신)훈육 주임이 됐다.

창씨 개명을 거부했을 정도로 강한 민족 정신을 가졌던 이 선생은 그러나 일제의 강요에 못이겨 대학생들에게 '학병' 지원을 권유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사표를 내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반일 선각자이자 친구였던 두 사람의 우정은 자식들에게 까지 이어져 서울대 국문과를 다녔던 정박사의 차녀 덕모(德謀.74)씨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있던 이 선생의 차남 봉기(鳳基.79)씨는 가약을 맺게 된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미국땅에서 이 양의 에세이는 지난 1972년 미국 이민을 온 가족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가족들이 이 양에게 정 박사 얘기를 한 것은 어려서 두어 차례 한 것이 전부였으며 특별히 가계를 강조하기 보다는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잃지 말라"는 당부를 늘 했다는 것이 이 양의 아버지 종훈(鐘勳.45.美식품의약국 병리학 담당)씨의 말이다.

종훈씨는 딸에게 직접 어떻게 외할아버지와 관련된 글을 쓰게 됐는지 직접 묻기 전까지만 해도 아내 박유미(朴由美.45. 조지타운대 영문학 교수)씨가 등교길에 미한 양을 차로 태워주면서 귀뜸해 준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것.

그는 "딸이 어렸을 때 들은 얘기를 스스로 기억하고 찾아내 글을 쓴 것이 놀라웠다"면서 "아이에게 하는 부모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는 뜻으로 '미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딸이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에 모두 도움이 될 인물로 성장하길 기대했다.

이 양의 에세이 수상으로 가장 감격했던 것은 19년전 사별한 아버지 정 박사를 늘 그리워해왔던 할머니 덕모씨였다.

덕모씨는 "교포 TV 방송에서 부시 대통령 앞에서 에세이를 낭독하는 미한이의 모습이 나오더니 곧바로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이 화면에 비쳐졌을 때 숨이 멎는 듯 했다"면서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 울음이 북받쳐 나왔다"고 말했다.

할아버지 봉기씨는 "일제의 피해를 직접 당한 나와 같은 세대의 한국인들이라면 미한이의 글을 더욱 절실히 공감할 것"이라면서 "일제라는 '악'에 항거했던, 정의와 자유를 사랑하는 한국인의 혼이 미한이에게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워싱턴=연합뉴스)